천변지나 dreaming/음미하기

위로/마음의 안부를.../모른다/꽃이 지고....(김소연 1)

지산22 2022. 2. 16. 17:49

1. 위로

김소연 (1967∼ )

 

위로이리라, 수백 년을 더

서로에게 가지로

닿아도 된다는 건

-라이너 쿤제,

⌜“필레몬과 바우키스” 주제의 변주⌟에서

 

나무는

별을 보며 이미지를 배운다

 

별이

유독 뾰족해지는 밤

 

나무들은 남몰래

가지 끝을 조금 더 뾰족하게 수선한다

 

나무들 정수리는

모두 다 별 모양이다

이동력이 없는 것들의 모양새는

그렇게 운명 지어진다

 

별이

별과 함께 별자리를 만든 건

 

고독했던 인류들이

불안했던 인류에게 남긴

위로의 한 말씀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은 몇십 센티미터가

몇억 광년과 다름이 없다

 

그래도 수백 년을 더

뿌리에게 뿌리로

닿기로 한다

 

내 나무는 어떨 땐

‘플랜트?’ 하고 물으면

‘플루토!’하고 대답한다

그건 내 나무들만의

비밀한 위트다

 

 

2. 마음으로 안부를 묻다

김소연 (1967∼ )

 

목숨 달린 모든 것들이

빛을 따라

거처를 옮긴다

 

강가에

불을 밝히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새하얀 이불 위에

물방개가 수북하다

 

베갯잎 모퉁이엔

잠자리 한 마리

 

들꽃들이

오므렸던 입술로 힘껏 벌려

빛을 향해 구애를 하는

아침

 

그들 깊은 사람을

오래 껴안다 깨어난 이 몸도

기억은 몸에만 남아

뼈마디를 돌봐야 일어서지는

아침

 

벌릴 것을 다 벌려

헐겁게 앉는다

 

 

3. 모른다

김소연 (1967∼ )

꽃들이 지는 것은

안 보는 편이 좋다

궁둥이에 꽃가루를 묻힌

나비들의 노고가 다했으므로

외로운 것이 나비임을

알 필요는 없으므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돌들도 운다

꽃잎이 진다고

시끄럽게 운다

 

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

대화의 너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외롭다고 발화할 때

그 말이 어디에서 발성되는지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시는 모른다

계절 너머에서 준비 중인

폭품의 위험수치생성값을

모르니까 쓴다

아는 것을 쓰는 것은

시가 아니므로

 

3.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김소연 (1967∼ )

 

할망구처럼

상사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끄덕여본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을 따라온 게 무언지는

알아도 모른다고 적는다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

 

꽃 지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걸지라도

꽃 피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거라고

오히려 적어둔다

 

잘했다고,

배롱나무가 박수를 짝짝 친다.

 

저녁밥 먹으러 우리는 내려가서

고깃집 불판 위

짐승의 빨간 살점을

꽃구경처럼 꽃놀이처럼

양양 씹는다.

 

: 눈이 내려 눈을 떴다. 몰래 소복소복 내린 눈 위에 아침이 되니 차곡차곡 쌓인다. 시집들사이 김소연의 시집-눈물이라는 뼈(2009/문학과 지성사)-을 손에 쥔 까닭은 첫 번째 시가 폭설의 이유로 시작되니까 유리창을 한 페이지 넘긴다/ 나는 하얗게로 지워진다 /지워진다로 정확해진다”.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새해 들어 시라는 양식을 매일 먹자고 약속했다. 오늘도 약속을 지킨 나에게도 잘했다고 박수칠 배롱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거슬리지 않던 4연이 고깃집 불판, 짐승-양양씹는 꽃구경이라니, 탐욕의 육식, 인간의 꽃놀이가 새삼 불편하다. 눈이 내리고 있으니, 흰쌀밥에 정갈한 봄똥 된장국을 먹어야 겠다.

눈이 내리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