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LETTET 30 여백과 여유 그리고 한라산
힘겨웠던 H의 지난 제주살이, 그리고 마지막이 될 여행학교의 다가올 제주살이, 기냥 제주 삼신할망께 맡겨버리면 어떨까? 도착하자마자 와흘분향당에 들러 소지천을 준비해 4.3 항쟁의 애도와 더불어 정성을 드리는거지. 기일인 7/17/27일 이면 더 좋구. 아님 새화리나 종달리 영험한 할망당에 불안한 미래까지 축원을 올리는 거지.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여백과 여유’에 마음을 쓰는 것, ‘신체는 지혜의 나무이며, 마음은 맑은 거울이니, 수시로 털어내고 닦아내어 먼지가 일어나지 않도로 하라’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도덕경의 한귀절이네. 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번뇌에 괴로울 때 종종 도덕경과 채근담(한용운의 마음의 사색)을 찾아보는데, 그러면 조근조근 나에게 가르침과 위로을 주거든. ‘본래 세월을 길고 긴데 바쁜사람이 저 혼자 재촉하고, 본래부터 천지는 넓은데 스스로 좁은 사람이 저 혼자 좁다 비좁다 하고, 본래부터 바람과 꽃, 눈과 달은 한가로운데 괴로운 사람은 저 혼자 바쁘다-바쁘게 살지 마라 중에서’. 한용운의 채근담은 나에게는 애장하는 오래된 책인데, 포스트잇이 많이 붙어 있어. 대부분은 포스트 잇으로 표시한 곳은 나의 취약점과 나약함에 대한 따듯한 회초리쯤 될 것이야. 놀이하듯 아무페이지나 펼쳐 그날이 마음의 회초리를 새기는 거지. 신기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네. 한편으로 강력한 처방이 필요할 때는 표시해 둔 포스트잇만 펼치는 것. 그러면 직방이지. 몇일 전에 읽은 아룬다티로이의 ‘지복의 성자’에서도 카슈미르내전의 전장 어둠의 선상의 밤에 무사와 틸로가 시집을 아무곳이나 펼쳐 낭독하며 죽음의 강이 흐르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버티지. 참혹한 전쟁, 인간이 야수로 변한 악의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살아남는 것, 아니 살아내는 것, 싸우는 것 4.3항쟁도 많이 생각나게 했던 책이야.
암튼 제주여행학교는 시간이라는 선물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가르치고, 도전하고, 존중할 수 있게 보살피는 사람들과 함께 하니까. 난 지난 주부터 11월 제주를 생각하며 정지용 시인의 한라산에 반해있어.
백록담 (白鹿潭)
- 한라산 소묘 (素描)
정지용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咸鏡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八月)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山)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통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바야흐로 해발육천척(海拔六千呎)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山)길 백리(百里)를 돌아 서귀포(西歸浦)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登山客)을 보고도 마고 매여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香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濟州)회 파람새 회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때 솨 - 솨 -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석이(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을 색이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白鹿潭) 조찰한 물을 그리여 산맥(山脈)우에서 짓는 행렬(行列)이 구름보다 장엄(莊嚴)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채로 살이 붓는다.
가재도 긔지 않는 백록담(白鹿潭)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백록담(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전집 1⟧(1988/민음사)에서 인용 -
시인이 오르는 한라산은 이렇구나. 감탄 또 감탄! 8월 한라산 기행(등반)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그렸네. 지금이야 한라산 1800고지 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저 아래부터 올라갔을테니 기진했을게야. 정지용시인이 시를 발표한 때가 1939년 4월이야. 그러니까 그 전에 올랐다는 거지. 한라산 백록담까지 기행시. 난 백석과 정지용시인의 시를 낭독하면 눈앞에 풍경이 파도라마처럼 펼쳐지고 요술부리듯 자연과 동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한글의 마술을 느끼네. 한글이 악기가 되어 연주를 하는 거지. 성우가 아닌 내 목소리도 마치 동굴속에서 울려퍼지는 울림이 있게 한다고 할까.
뻑꾹채는 뻐꾸기가 노래하는 5월에 피는 꽃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네. 산에 사는 사람들은 뻐꾸기가 피우는 꽃이라고 믿고 있다는 데, 연보라색의 꽃이야. 실제로 뻐꾸기는 5월에서 8월까지 울기 때문, 또한 꽃봉오리에 붙은 비늘잎이 뻐꾸기 가슴 털 색깔처럼 보인다고 해서 뻐꾹채라고도 했다고도 하네. 그 뻑국채가 절정이 가까워질수록 키가 점점 작아저 사라진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오르면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결국에 꽃모양으로 판박이고. 높은 고지에는 함경도 끝과 맞서는 바람이 차서 뻑국채는 아조 없고 팔월 흩어진 별빛만 가득하다. 그 산그림자 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뻑국채꽃밭에는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한라산 삼각봉과 용진각 별빛아래 나도 기절했거든. 암고란은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 고란초의 어여쁜 열매를 먹고 기진했다가 살아났다. 고란초의 열매는 잎뒤의 포자차럼 열려 꼭 환약같아. 흰자작나무가 살아 다썩어 흰 뼈가루가 되기까지 산다. 도깨비꽃 즉 한라산 푸른 산수국, 해발 1800미터 말과 소가 한데 어우러져있고 사람을 신경쓰지도 않는 평화로운 정경. 시인이 산을 오르나 목동에게 들은 이야기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어미소를 잃은 불쌍한 송아지. 풍란의 향기, 꾀꼬리, 휘파람새 소리, 돌에 물이 구르고, 바다가 구겨진다니! 파도소리 솨 솨. 시인이구나 물푸레나무 동백, 떡갈나무에서 길을 잃은 시인, 칡넝쿨 우거진 길을 헤메고 만난 아롱아롱거리는 점이 있는 말은 피하지 않는다.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끈끈이나물, 석이버섯 별과 같은 색이며 취하며 자며한다. 백록담 조찰한(잘잘못을 가려 상세히 살피다는 신성한)물을 그리며 오르는 등반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비는 놋낫(놋날같이 비가 내리치는)줄줄 맞으며, 무지개도 뜨고 꽃잎 위에 앉으니 궁둥이에는 꽃물이 들고 비맞아 옷도 살에 붓는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가재도 가지 않을 정도로 수면이 잔잔한 백록담 수면에는 하늘이 돈다. 실구름 일말, 한자락에도 백록담 수면이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갠(바라본-아마도 한나절동안 백록담을 돌지 않았을까)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리라 .... 카 ! 한라산에 올라 정지용 시를 읊조려야지.
여성산악인들과 하는 산책독서모임 10주년 기념을 11월 제주도에서 하기로 했어. 겸사겸사 9월 정모 지난 주에 함께 나눈 책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시기-제주편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2021/창비)야. 머리말이 제주허씨를 위한 제주학안내서더라고, 아마도 H는 당연히 벌써 읽었을 것 같은데. 30쇄를 찍고 2021년 특별판까지 발행한 책이네. 도보여행이나 등반이 주가 아닌, 제주 허씨가 되어 지도에 내비를 찍고 맘놓고 달릴 수 있는 안내지야. 90년대 후반 강진, 해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을 손에 손을 들고 다니며 누볐던 시절를 소환하며 추억팔이도 하고 즐겁게 책을 읽었네, 책속의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의 마지막 연을 저자가 소개에 놓았더라구, 맘에 콕 박혔지. 시인은 이렇게 산을 오르는구나. 정지용시선을 따라 한라산 백록담에 취해 제주의 가을을 만나야지.
10월 제주에 먼저 가는 H의 숨겨둔 제주이야기도 기대해 볼게. 퍼즐맞추듯이 그렇게 제주에 보물을? 뭔가를 남겨두길.
건강하게 잘 다녀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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