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지나 dreaming/쓰기 writing

LETTER # 1 먹고 싶은 게 뭐야 ? H ? 오고 있어 ? 왔어 ?

지산22 2021. 1. 27. 23:43

20210113

 

LETTER # 1

먹고 싶은 게 뭐야 ? H ? 오고 있어 ? 왔어 ?

 

H 너의 편지를 받고, 3가지가 떠올랐어,

먼저 글쓰기에 대한 물음과 존재(실존)의 모순 ? 이라고 할까 ? 두 번째는 포스트코로나시대로 인해 더 중요해진 일상의 (안전과 평온의)모습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 덕분에 되돌아 보게 되었어 마지막으로 2021년의 새로운 한해에 대한 기대와 욕망의 콜라보, 흔들리는 영혼의 두려움과 불안, 불만족과 약간의 회색빛 환멸(이상이나 희망의 환상이 사라지고 현실을 접하는 허무함)과 희미한 무력감 ?. 냄비에 라면을 끊이려고 물을 붓고 가스 불을 켰는데, 불 조절을 하지 않는 것 같은 그래서 정말 라면을 먹고 싶은 것인지 ? 아예 라면 같은 것은 먹고 싶지 않기도 하고.... 먹기 먹어야겠는데.... 이런 상황 왜 나는 라면을 먹는가부터 다시 ? 고민한다고 할까...

편지의 오독은 아마도 내가 현재 세상을 보는 렌즈일 거야. 마지막의 자기혐오와 환멸의 향기는 내안에서 흘러 나오는 열등감과 나약함인지도 모르겠어. 덕분에 그 향기를 따라가다보니 오늘아침까지 아미엘 쓴 50대의 그의 인생일기까지 읽고 필사하고 있더라구. 그렇게 뛰어난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아미엘도 모순적이며 자기비난을 하거든...(첨부할께)....그럼에도 역시 글을 잘 써...

 

글감, 쓸감, 땔감을 고민하기 보단 나는 쓸 것은 많은데, ‘감감감감은 많은데 왜 쓰지 않는 것일까 ? 에 더 많은 이유를 찾고 있어. 2년전 부터는 이유가 핑계가 되어버린 나의 쓰기의 나태함을 조금 들여다 보던 중 블러그 글쓰기의 권유를 받고 H와 함께 하게 된 것이었지.

종이로 된 책자체를 사랑하는 나는, 그에 관한 한 애착과 집착을 넘어 욕망 덩어리인 셈이지. 수집과 소유욕을 생각하면 소박단순청빈을 지향한다는 삶의 방식에 완전모순이지. 역시 나약하고 흔들리는 가련한 영혼이지. 책에 대한 탐미와 중독. 소박하게 소장하고자하고 단순하게 읽기만하고 청빈한 글쓰기 즉 오랜 시간 쓰기와 멀리한 청빈가난한 삶이 되어 버렸어. 게으른 독서가 된 것이지. 책을 들고 카우치에서 앉아 언젠간 엔젠간 쓸거야, 나이들면 쓸거야,,,지금은 읽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많아...핑계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지. 안온한 핑계의 이불을 들춰보니 글쓰기에 대한 나의 방어기제(심리적인 자기보호를 위한 방어막)가 있었는데, 일종의 주지화, 합리화 등을 사용하는 것이지. 예를 들면 InputOutput으로 쓰기는 출력인 셈이지. 독서 즉 (다독 多讀)읽기가 흘러넘친다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쓰기될 것이라는 믿음 거기에 대해 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독서파만권 하필여유신) 당나라 시인두보의 책 만 권을 읽고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 복숭아뼈가 다섯 번이나 구멍이 나고 다섯 수레의 책을 읽고 쓰는정약용의 書香墨未(서향묵미)에 대한 환상 거기에 더해 헨리데이빗 소로와 다작으로 유명한 카를구스타프 융의 5년 이상의 은둔 칩거 생활 등....게으른 독서의 쾌락에 중독되어 어설프게 아는 척만 하고 있고, 척만 했던 것도 희미해지고 언젠가 나이들면 쓸꺼야하면서 50이 된 것이지. 핑계의 이불아래에는 욕심(욕망-囊中之錐)의 요를 깔고 열등감(특별함과 뛰어남과 똑똑함의 열망)의 베게를 베고 있는 내가 있어. 囊中之錐(낭중지추) ‘주머니속의 송곳 즉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된다-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 보이고 싶은 만큼 내가 특별하지 않는 별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글쓰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자기를 알아간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기도 해), 나의 모순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이지.

 

쓰기는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나는 왜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자기물음을 계속 던지고 있어. 무엇이든 써보는 단계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나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똑똑하고 뛰어나고 특별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어. 쓰기를 통해 내안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시간이 갈수록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좋은, 괜찮은 사람말이지(의문을 던지고-회의하는 인간-조금씩이라도 버리고 나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갖고 행동하는 정의로운 사람). 우선은 지금까지의 책의 소유와 맛보기만 하는 다독(多讀)에서 벗어나 삼키고 소화시키는 적극적 읽기 정독(情讀)인 쓰기를 통해 나를 알아가고 다듬는 훈련을 하려고 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書香墨未(서향묵미 책의 향과 먹의 맛)의 읽고 쓰는 풍요로운 60의 노후준비를 하는 거지. 글쓰기의 달인들이 말하는 엉덩이의 힘의 진리 즉 일만 시간의 법칙을 읽은 만큼 쓰기에도 노오력을 하려고(내안에 흘러넘친다는 환상과 一筆揮之(일필휘지)의 망상을 버리고), 일만시간이란 하루에 세 시간씩 십년이 걸리는 시간인 셈인데... 쓰지 않고서는 쓰기가 즐거워지는 날이 오지 않겠지.

 

케맥스 커피를 한번 먹어보고 싶네. 난 작년부터 전주시 사회혁신센터 성평등전주라는 2층 공유공간연구실을 이용하고 있는데, 1층의 협동조합 오늘이라는 카페가 있어. 이곳에서 커피를 주로 먹어. 나를 포함 연구실에는 3명의 연구자가 사용하는데, 각자의 책상과 락커 룸이 있고 쾌적한 환경이네. 성평등전주플랫폼은 전주로 이주한 후 페미니즘팟캐스트 살롱드전북을 제작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곳이야, 다양한 지역의 성평등활동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인데 덕분에 저렴한 임대료와 관리비(2만원)으로 9시 출근의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오랜시간 불안정한 도시특수빈민 프리랜서로 활동해 온 나는 거리두기나 접촉금지의 코로나19 위기와 재난이 새삼스럽게 어렵지는 않았어. 코로나전부터 자발적 격리와 칩거가 익숙한 생활방식인지라, 오히려 공유공간연구실을 1인실처럼 이용했지. 작년 한해는 전주시의 소소한 프로젝트사업(아이디어공모, 커뮤니티사업 등)을 하면서 근근히 연명했는데, 코로나가 장기화될수록 그나마 교육이나 강의를 통한 불안정한 소득마저도 끊겨 최소한의 생계비로 버티기를 하고 있어.

연말부터 코로나3차 지역확산으로 외부활동이 전면금지되어 달리기나 축구 등 신체의 활력을 주는 운동을 마음대로 못하니...축구가 하고 싶네. 한편으로 시간부자로 뭔가에 몰두와 탐독하기 좋은 때라 아직까진 평온하게 지내고 있어. 문득문득 풍전등화같은 처지에 생존의 공포가 불어와 오늘의 평화를 깨뜨리는 순간이 엄습하는데, 나만의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 내적균형을 찾으려 해. 요즘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자기 전에 하루의 3가지 감사한 일 또는 잘한 일을 찾아 되뇌이고 축복하는 것. 즉 자기통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해, 위기와 재난시에는 자기통제력이 더 중요한데 통제력을 위해서는 첫 번째는 자신의 신체()을 통제하는 것 두 번째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갖는 것 (긍정, 희망은 유능감이자. 자아의 능력감과 가치감이거든) 셋째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오늘 할 일을 하는 것 예를 들면 어제밤 잠자기전의 3가지 (해맞이 요가자세 3번 한 것, 책을 읽고 글을 쓴 것, 1일 드로잉 등)감사의 루틴. 일상의 작은 불만족과 불평이 습관이 되면, 불안을 증폭시키고 존재를 짓누르거든. 내적균형이 깨지면 절박해지고 내 안의 우울은 언제든 부정적인 현실을 인식하며 환멸감이 되어 나를 잡아 먹거든. 잡아 먹히기 전에 미리미리 도망가는 거지(예방하는 거지-심리적인 백신). 오롯히 혼자있는 요즘 불안이 나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영혼과 젖은 영혼을 말리는데 산책과 햇빛만큼 좋은 것이 없지? 물론 더 좋은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이지만. H의 현재가 따사로운 햇빛과 영혼을 정화하는 동물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따뜻한 오늘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꿈꾸던 날들이 아닌가 ?) 연인과 동물가족을 떠나보내고 홀로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말이지. 더불어 안전하고 안온한 H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시작되는 직장생활, 2시간의 출근이 모험적인삶인 것 같은데, 포스트코로나시대에는 평범한 보통의 일상-일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거든...

 

2021년 새해를 멋지게 시작한 시인이 생각나. 이안 시인은 새해가 되면 1년동안 함께할 말과 꽃을 찾는다네. 시인은 새해 포스트코로나1천천히 오는 기쁨말로 올해를 맞이하고 싶다고 했어. 시간을 오래 기다리며 걷는 이에게 도착하는 기쁨-천천히 오는 기쁨. 안 오는게 아니라 너무 천천히 와서 안 오는 것 같이 느껴질 뿐이라고 말이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새해 각자의 말-자신의 삶을 이끌어 줄 작은 믿음 하나를. 2021H에게 도착할 기쁨은 오고 있어 ? 벌써 왔어 ?

 

추신 ) H의 편지를 읽고 오랜만에 아미엘의 일기를 펼쳤어. 그는 평생 일기를 썼고, 35년동안 기록이 책으로 묶여 있어. 그중에서 지금의 내 나이 50을 지난 날의 내용이야 오랜만에 필사해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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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헤매고 어슬렁대며 유유자적하면서 멀리 돌아왔다. 가능하다면 무익한 일을 그만두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에 매달리고, 나의 희망을 단순하며, 나를 집중하게 하고 요약하지 않으면 않된다. 너는 3년전에 그것을 생각했었다. 일시에 많은 혁명을 일으킬 각오였다. 그러나 그 뒤에 중요한 혁명을 실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너는 습관에 따라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그 날이 그날인 생활이 다시 너를 붙잡았다. 방만함이 너의 현명한 생각이 되었다. 너는 위험과 적을 외면하려고 타조처럼 날개 밑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네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세 여자의 우정이었고, 특히 그 중 하나는 친밀하고 진심인 것이 되었으며, 너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영혼을 알게 했다. 그러나 현재의 느슨함은 너에게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눈을 떼게 한다. 너는 지금까지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훌륭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건강회복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의 분노와 예견하는 방법을 잊고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예견에 대한 너의 반감은 염치없게 나타났다. •••••

진절 머리 내지 않는 사람,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 결심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늘 너의 식격을 의심하여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의 제2의 본능, 생각만으로도 굴종에 견디지 못할 허약한 본능이 항상 그곳에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너의 제1의 본능을 사랑에 의한 활동, 나아가 미적인 약진에 의한 활동이다. 너에게 없는 것은 바로 의지작용의 남자다운 가혹함과 저 자신의 이해를 따지는 데서 오는 낯두꺼움이다. 너의 불행은 여자도 아니건만 여자의 본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너는 초대받기를 바라지, 억지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너는 필요한 만큼의 명예심과 투쟁심을 갖지 않았다. 너에게는 베짱, 희망, 용기가 없다. 너는 너의 문체를 학대하고, 운명에 도전하며, 감수성을 청동처럼 단단하게 할 수가 없없다.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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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까지의 세상은 우리가 자기 초상을 그려가는 액자의 가장자리이다. 50세 이후부터 우리 개체가 퇴색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게 되면, 우리보다 나은 것, 위대한 것, 즉 조국과 과학, 인류 속에서 자기를 잊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만약 젊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른 죽음을 면하게 하고, 침몰하는 배를 떠나 돛을 펼친 배로 옮겨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난파한 사람뿐만 아니라 유일한 구조수단에 반감과 모멸을 갖게 하는 불만스러운 생각을 경계하라, 본능은 너를 외면하는 자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존심은 우리 주위에 고독한 상태를 만든다. 자기 자신, 자기의 기호, 자기의 포부, 자기의 권리, 자기의 취미를 도외시하고, 사람들의 존중도 정의도, 동감도, 선의도 바라지 않고, 제도 또는 공동체 같은 뭔가 위대하고 영속적인 것의 선 및 행복만을 바라는 것이 낫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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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 쓸쓸함, 지독한 기침, 은빛 줄의 증가, 불가능한 것과 돌이킬 수 없는 기분, 광란 및 어리석음의 인상, 생의 권태, 자기혐오, 굴욕, 회한, 나 자신의 죽은 껍데기에 대한 지각, 언제까지나 내게 거부를 당하는 명쾌한 의식, 나는 잊는다. 그러나 나는 체념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나는 욕망을 억누르지도 채우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숨을 멈추고 만다. 나의 운명을 탄식하기에는 자존심이 지나치고, 운명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힘이 없으며, 나 또한 세계를 대적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운명에 대해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나는 난파를 만났지만 그것을 모르는 인간이다. 나는 마땅함을 벗어난 명예심이며 손생된 인생이다. 의혹은 나의 희망마저도 쓰러지게 해버렸다. 내가 저서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의 위태로움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인다. 나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진정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비록 성실한 여인의 손을 잡고 내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죽음이 그 손을 나의 손 안에서 차갑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믿을 수 없고 잔혹한 것이어서 나는 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생명이 보내준 것은 이용하지만, 좋은 날씨를 바라지 않듯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가정부가 편지를 가져다 준 것이다. 연극의 속임수이거나 신의 섭리의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편지는 셀리느에서 온 것이다. 우울함에 빠졌을 때는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내게 청한 적이 있는 아주 친한 여자친구에게서 왔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눈시울 뜨거워지게 하고 또 사람을 생각에 빠지게 한다.

 

앙리 프레드릭 아미엘(18211881)

아미엘(18461881)의 인생일기 Amiel's Journal (이희영 옭김, 2006/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