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존재하기 : 내마음대로 달리지 못한다.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결국 못하는 것 그리고 노추(老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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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7월 29일 10k 나이트러닝
일 8월 2일 8k 아침 러닝
전주에 내려와서 삼천천이 범람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만두피가 터지거나 김밥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천변의 떠내려온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와 꺽인 나무와 풀들이 노랑 흑탕물로 지저분했다. 비가 스콜처럼 내렸다. 천변에 징검다리는 물에 잠기고 모악산에 운무가 막춤을 춘다. 신기하게도 비가 하루종일 내리면 사라진 태양이 몹시 그립다. 마치 태양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전조처럼 조급함마저 든다. 나는 유럽처럼 비와 안개가 잦아 햇빛이 사라진 곳에 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늘 곁에 있지만 사라져야 소중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3일째 달리지 못하는 수요일 밤, 성평등전주에서 풍선에 바람이 차오르듯, 빵빵한 달리기의 욕망이 가득찼다. 2월부터 전주시 사회혁신센타 성평등플렛폼 성평등전주라는 공유공간 2층의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다. 자유연구활동가로 등록해 공유공간을 이용해 사무기기도 무료로 사용하고 살롱드전북 팟캣 녹음도 하고 독서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을러 ‘달리지 않는 날’도 많으면서, 누군가나 무엇에 의해 ‘달리지 못하는 날’은 달리지 않으면 뭔가 곧 터질 것 같은 답답함, 그나마 돌아가던 뇌신경도 막혀버려 막막함이 차오른다. 수요일 밤이 그런 날이었다. 밤 8시를 지나 갑자기 비를 뚫고 집에 와서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달려나갔다. 텁텁한 비바람, 비줄기가 가늘어진다.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살고자한면 죽고, 죽자고 하면 산다고 너무 비장한가? 비와 함께 하겠다고 맘을 먹으면 비의 장애물이 사라진다. 청량한 달맞이 꽃이 등불이 되어 천변을 비추는 밤의 레이스였다. 비와 땀으로 일상의 답답함과 존재의 허무가 주는 막막함이 조금씩 사라진다.
달리기의 정직한 땀은 천변의 비를 물리치고 반달을 보내주었다. 한참을 달려 범람하는 천변 저수지 포말과 달빛에 취한 내자신을 또 다른 내가 내려다 본다. 나를 향해 미소짓는 달, 달이 환한 여름밤이 되었다. 축복의 시간이다. 어둠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 자연이 주는 위로, 달의 치유구나. 달리기에 취하는 것은 첫째는 정직한 땀이요, 둘째는 바람이다. 달리는 순간 내가 바람이 되기도 하고 바람으로 전하는 자연의 언어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가끔 내자신과 친구가 되어, 내자신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달리는 나와 함께한다. 달리기를 즐긴다면 말이다. 선물같은 밤이다. 누군가에는 그토록 살고 싶은 오늘이다.
목 금요일 ‘달리지 못하는 날’이 계속 되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잦은 장마비가 멈추기 시작했다. 정작 비가 멈춘 토요일 오후에는 ‘달리지 않는 날’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못하는 것과 않하는 것을 편식하듯 변덕처럼 바뀐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활자의 레이스를 달린다. 나의 모든 게으름을 독서로 용서한다. 책으로 도피만큼 좋은 것이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실이 디스토피아보다 더 생생하다. 불확실과 불안의 시대에 sf속 소설속의 한 장면이 매일매일 펼쳐진다. 디지털 시대의 디스토피아 미래를 생각하면 스마트폰/디지털세상-을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와 격차가 심각하다. 노화와 더불어 디지털 부적응자들은 나중에 어디가서 음식 주문도 못해 도태되어 있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몇일전에 본 신문기사와 심여울의 ‘나는 절대로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가 생각난다. 디지털기술과 시대에 도태된 종이 되는 노화된 인간-미래에 살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종....
“우리가 체감하는 노화는 쌓이는 시간의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방심한 사이 어느 순간 이뤄지는 종의 전환에 가깝다....나이는 자기 마음대로 들지 않는다...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심여울 소설속의 미래는 영상, 터치의 시대가 아니라 대화형인터페이스, AI인공지능칩을 이용해 일상을 살아가는 미래다. 주인공 노인들은 최신 기종과 기술의 핸드폰사용하고, 기종에 따라 계급격차와 불평등의 세계가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노인들은 보청기를 겸한 실버아이팟을 사용하지만, 음성인식 인공지능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 즉 컴과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근 40년 이상 접촉의 시대를 살아온 내가 접속의 시대, 가상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있다. 지금의 스마트폰 사용처럼(현재 나는 삼성의 갤럭시 노트10시대에 노트5를 사용하고 있다. 노트5기능도 허덕이며 사용하고 있는데....). 디지털 시대에 도래할 미래, 접속의 시대에 노추(老醜)한 상상속에 나를 바라본다. 자동화 기계앞에서 햄버거조차 시키지 못한....
30이 지나 막연하게 이런 노인은 되지 말아야지 해던 것은 나이권력으로 역정내거나 큰소리로 막무가내 고집피우는 노인/ 시대를 탓하며 이해안간다는 말을 하며 자기말만 하는 노인/ 자기신체관리 잘 하고 민폐주지 않는 몸 등등이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디지털 접속의 시대에 적응/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사라진 아날로그 접촉을 고집하며 역정내는 추한 노인이 될 것 같다.
소설속의 한노인은 미래의 디지털시대에 따라가고자 하지만 ‘못하는 것’이고 한노인 ‘않한다고 하지만 못하는 것’이다. 결국 둘 다 ‘못하는 것’이 되고 “노인들은 죄다 진상들”이 된다. 공유공간의 30대 지인은 나에게 QR코드 만드는 법을 3-4번 반복해서 가르쳐주면서, 계속 배워야 한다고 자신도 미래의 햄버거도 못시켜먹을까봐 공포심과 두려움이 있다고.... 반복한 나의 물음에 답을 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고.....아 ... 적당히 살고 싶다.
“노인이 돼서 안 추해지기 더 힘든 걸, 젊은 시절에 다 써버린 품위의 밑바닥까지 긁고 있으면 그게 노추지”
않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구분이 필요없이 못하는 것이 되는 노화
좀 못하면 어떤가 ? 노추 ? 추할까 ?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을 때까지....... 적당히 즐기며 늙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달릴 수 있다면 노추(老醜)가 아니라 노락(老樂)이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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