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지나 dreaming/쓰기 writing

20210826 # LETTER 25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지산22 2021. 8. 26. 21:24

20210826 # LETTER 25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 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는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言路

 

!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 앉는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국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친 문장들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창비/2009) 시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