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LETTER 18 시선
지난번 보내 준 편지 잘 받았어. ‘페미니즘이력서’ 1편을 읽으면서 H의 활동의 시작과 청년시절을 알게되었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청소년쉼터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구나. 일했던 곳이 성폭력상담소 부설기관이라는 것, 친족성폭력피해자들을 위한 일상의 돌봄과 치유를 지원하는, 그들의 가능한 오늘(매일매일)을 만들고 현재의 삶을 연결하는, 소중하지만 그 만큼 힘든 활동을 하며 페미니즘을 만나 지금까지 근 20년 넘게 청소년들과 함께 한 여정을 페미니즘이력서로 써내려간 편지. 문득 뒤돌아 걸어온 과거의 길을 마주보는 보는 것 같았어. 시간이 지나 그 길을 함께 걸어주지 못했지만, 다시 쓰여지는 지금 찬찬히 살피며 나란히 걸어갈 수 있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을 전해. 자신을 돌아보며 질문하는 것, 죽음들을 애도하고 자신의 언어로 ‘페미니즘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와 젠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며 써내려간 H의 페미니즘이력서 2편의 편지도 기대할게. H의 ‘페미니즘이력서’는 왠지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H의 삶이 시작되는 자리같거든.
각자의 몫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살아내야만 하는 절망의 현실에서 모두가 자신만의 빛을 찾아 가는 희망의 여정에서 다가온 페니미즘. 나에게 페미니즘은 인간의 자유과 평등의 원을 확장시키기 위한 경계를 허물기. 더 나아가 자연과 동물, 종차별넘어 생태와 생명돌봄을 위한 실천의 윤리이자 삶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지금은 평화로운 공존?’ 전략인 셈이지.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의 전략으로 ‘젠더(전형적인 성별이분법 사회에 저항하고자)’가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여성운동 덕분에 젠더라는 용어가 보편화된 셈이지.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용어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 변화하는 현실과 현재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대가 호명하는 젠더의 의미와 경계에 물음을 던지면서....
오래전부터 가부장제 남성중심 사회의 폭력과 착취로부터 여성(여성과 같은 약자들)의 권리와 신체의 온전성을 누리기 위해 아직도 싸우고 있지. ‘여성’이라는 ‘젠더’의 폭력과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한 ‘트랜스젠더’의 ‘트랜스’와 ‘젠더’는 젠더를 해체하는 전략이자 삶인가? 라는 회의가 들어. 또 한편으로는 생명신체에 위험한 (의료)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그것이 자유와 평등인지 ? 디지털기술을 이용한 성범죄가 판치는 세상에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 줄 사이보그-인간은 젠더의 경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주체, 포스트휴먼이 될 수 있는지 ? 과학기술이 가져다 줄 진보가 내가 사는 시대에 어디까지 전개될 것인지 ? 기술에 따른 인간의 인위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고해야 하는지 ? 인간의 가치와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 이에 인간관과 인간상자체가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오늘도 페미야학에서 에코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테크노필리아(인간과 과학의 평화로운 공존이펼쳐지는)와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억압, 지배하는 테크노포비아에 여성의 신체와 생식력, 재생산권에 대해 답답한 고민과 뭔가 이야기 나눌수록 미궁, 미로가 갇히는 기분이야. ‘트랜스젠더들’을 보면서 내가 육체에 갇힌 걸까 ? 아님 트렌스젠더가 진정 젠더에 해방된 걸까 ? 젠더에 종속된 존재(육체)일까 ? 해체되고 확장된 존재인가?
어제 신문에 뉴질랜드 트렌스젠더 ‘허버드’라는 MTF 여성역도선수가 도쿄올림픽출전자격을 얻었어. 허바드는 2013년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까지 남자 역도선수로 활동했고 수술 후엔 여자 선수들과 경쟁했어, 이에 허바드와 같은 역도경기를 하는 벨기에의 여자선수는 IOC측 결정에 반발했어. 2015년에 발표된 IOC지침에는 트렌스젠더 선수들의 경기 참가규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한 트렌스젠더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하기 전 최소 12개월동안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1ℓ당 10나노몰 이하일 경우에만 여자 종목에 출전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고 하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지침에 대해 "남성으로서 사춘기를 겪은 사람들은 호르몬 수치와 상관없이 이미 신체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어. 트렌스젠더들만 종목이나 리그를 따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 트렌스젠더를 생각하면 항상 체한 것처럼 언쳐있는 것 같아. 과거의 레즈비언캠프와 현재의 엘캠프에 어울렸던 소수의 트렌스젠더들, 그들을 바라보며 내안의 나는 젠더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레즈비언과 오히려 젠더의 벽을 공고히 하는 트렌스젠더들을 보거든.
그러고 보니 요즘 체해서 언쳐있는 것이 또 하나있네, 지난 편지에서 소개한다던 시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해? 예술비평학교 ‘다리미’강좌를 듣고 있다고 전했지. 장은정평론가가 전해 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현재까지 시대별 세대별 여성시인의 여성주의 시에 대한 8편을 함께 읽고 나누었어, (최승자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김혜순시인의 ‘딸을 낳던 기억’, 황인숙시인의 ‘바람 부는 날이면’, 김연희시인의 ‘미꾸라지 숙회’, 성미정시인의 ‘동화-파랑새’, 이수명시인의 ‘토요일 오후’, 김민정시인의 ‘젖이라는 이름의 좆’, 이소호시인의 ‘경진이네-거미집’, 주민현시인의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펭귄’). 가장 인상깊은 시, 좋았던 시, 불편했던 시, 좋아서 불편해서 인상깊을 수도 있는 시들, 온라인 줌 수업이라 아쉬웠지만 시를 읽고 각자의 삶의 경험으로 시를 통해 느끼고 나누는 자리, 차이를 통해 배우고 나가갈 수 있어 좋았어. 이이와 H와도 언제가 함께 나누고 싶네. 시들을 보내 줄게.
그 중에 나는 소화안 되는 날음식, 체할 것 같은 음식 이소호시인의 ‘경진이네-거미집’을 맽지도 못하고 먹고 있어. 결국 그녀의 ‘캣콜링(2018/민음사)’이라는 시집을 구매해 내마음에 거울에 비춰보고 있네. 한장한장 넘기는 것이 힘드네.
‘시는 거울이다’라는 장은정평론가의 시읽기에 대한 3가지가 다가왔는데 첫째, 자신의 현재의 삶의 맥락과 감각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느끼는지 즉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 둘째는 누군가에는 다르게 읽힌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읽힐지 상상하며 읽는 것 마지막으로는 시가 쓰여진 시대. 그 시대는 어떻게 이시를 소비했는지 ?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의미화하는 것. 87년생 이소호시인이 재현한 폭력적이고 악하고, 적나라하고 난하고 독해서 해독(害毒과 解讀)이 필요한 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의 감각인 걸까 ? 이렇게 난해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잔인하게 재현하는 이 시대의 시들, 이 시대에 효용한 시의 역할인가 ? 백수린소설의 책 ‘참담한 빛’ 제목처럼 참담하네. 고통과 상처를 폭력으로 재현하는 시들이라....폭력으로 소비하는 시대의 시들이라....낯설고도 슬픈시대.
비평의 출발은 타자의 눈으로 보기라는데.... 타인의 시점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나아가 과거의 눈과 미래의 눈을 겹쳐놓고 현재를 다시 보는 것,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통찰 할 수 있는 시선이 절실하게 갖고 싶네.
참 오랜만에 다녀온 지리산, 지리산은 잘 있어, 노고단마고할미께는 감사인사와 기원을 했어, 미친 듯이 종주를 걷고 먹고, 행복하게 달리고 먹고, 강변에 쏟아지는 시원한 웃음, 먹고 또 먹고, 축복과 응원의 불일폭포와 쌍계사 순례, 목월빵집까지....잘 놀았네.
지리산은 언제나 옳다. 여름이 가기전에 지리산에서 함께 하길 전하며,
“걱정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중에서
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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